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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25 전쟁과 이승만 대통령 하야 9

by ㅿㆁ 2022. 4. 22.

1950년 6.25 전쟁 이후 어떤 과정으로 남과 북이 분단됐으며, 그 이후에 우리나라의 정치는 어떻게 변했을까? 6.25 전쟁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후 박정희가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까지의 역사를 알아보았다.

 

6.25 전쟁의 역사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남한을 쳐들어와 기습적인 공격에 남한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북한은 남한을 진격해 거침없이 내려오지만 마지막 낙동강 경계선에서는 남한이 죽을힘을 다해 버티며 북한을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하게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치하던 중 북한의 방심을 틈타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휘로 북한 조선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인천에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펼친 상륙작전)으로 남한의 반격이 시작되었으며 남한은 북한의 압록, 두만강 경계선까지 밀고 올라가며 통일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성능이 뛰어난 무기의 사용보다는 다수의 병력을 투입하여 적을 압도하는 전술), 1.4 후퇴(한국전쟁 때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북진했던 유엔군은 중국군의 공세로 인해 1950년 11월~1951년 1월에 서울 이남 지역까지 철수한 사건), 흥남철수작전(한국전쟁 시기 1950년 12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인해 북진했던 미군과 한국군이 피난민과 함께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선박으로 철수함)으로 인해 남한군은 밀려나 서울마저 포기하고 남쪽으로 쫓겨난다. 하지만 남한은 평택 오산 부근에서 재 반격하여 서울을 다시 되찾기 시작했고 지금의 38선까지 진격했으며 그 당시 전선이 굳어 지금까지 전쟁은 고착되었다. 

 

4.19 혁명과 이승만 대통령 하야

이승만은 반공포로(6.25 전쟁 당시 공산주의에 반대하던 북한 출신의 전쟁 포로)를 석방하고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으며 6.25가 끝나고 이승만 대통령의 임기도 마무리되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대통령을 유지하고 싶었던 이승만은 사사오입 사건으로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3선 금지 조항 철폐를 내용으로 2차 개헌을 한다. 결국 1956년에 다시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반대파 제거를 위해 신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진보당 사건(1958년 7월에 이승만 정권은 진보당 당수 조봉암 등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서 사형시킨 정치탄압 사건)을 일으켜 권력을 잡는다.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한 이승만과 자유당은 1960년에 3.15 부정선거를 단행하였으며, 이때 마산에서는 부정선거 철회를 위한 대규모 시위가 열리며 다른 도시로 확산된다. 이 시위는 김주열 열사 사망 사건으로 확대되고 4.19 혁명(1960년 4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시민들이 들고일어나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끝낸 민주주의 시민 혁명)을 불러온다. 이승만은 이 사태를 막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국민들에게 발포하기도 했지만 국민들의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 후 하와이로 망명한다. 

 

5.16 군사정변

 

 

이승만 정부가 물러나고 허정과도정부(과도정부는 여·야합의로 짜인 민주화 일정을 관리하는 것이 임무를 함)가 등장하였으며 3.15 선거를 무효로 선언하고 3차 개헌을 한다. 이에 따라 양원제(국회가 두 개의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제도로 일반적으로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됨) 국회가 들어서게 되며 간선으로 윤보선을 대통령, 장면을 총리로 선출한다. 장면 정부는 3.15 부정선거 사법 처벌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남북평화통일 등의 의지를 밝혔지만 일을 제대로 추진하지는 못했으며 국민들은 큰 실망을 했다. 정부와 국회가 정신없는 상황에 군인들이 들고일어나 1961년에 5.16 군사정변(1961년 5월 16일에 박정희 소장을 비롯해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일으킨 정변)을 일으킨다. 박정희는 무력으로 서울의 주요 기관들을 점령하여 장면 정부를 뒤엎고 계엄령을 선포한다.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6개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여 윤보선에게 승인을 얻어낸다. 얼마 후 국가재건최고회의(5·16 군사정변 주체세력이 입법·사법·행정 3권을 행사했던 과도기의 국가최고통치의결기구)로 명칭을 바꾸어 군사 내각을 세우게 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차 개헌을 통해 의원내각제를 다시 대통령제로, 양원제를 단원제로, 대통령 간선제(대통령을 선출할 대리인을 선출하는 제도)를 직선제(유권자가 직접 투표에 참여하여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방식)로 바꾸었으며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정하여 추진할 것을 약속한다. 1963년 박정희는 군대를 제대한 후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당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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