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대로 우리 민족이 가장 아픈 상처를 입었던 수난의 시기였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은 일본에게 어떤 수난을 당했으며,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일제강점기의 역사
우리의 아픈 역사인 일제강점기는 무단 통치기, 문화 통치기, 민족말살 통치기로 나눌 수 있다. 각 시기에 역사를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 1910년~1919년 무단 통치기
일본은 한일합방을 성공하고 조선에 총독부를 설치해 통치하기 시작했다. 헌병경찰제의 실시로 우리 민족을 억압했으며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금지했다. 조선인을 대상으로 태형을 실시했으며 학교 선생님과 행정관리는 칼을 차고 다녔다. 일본은 더 나아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며 기한 내에 자신이 가진 토지를 신고하지 않는 경우 조선총독부가 몰수하겠다고 하지만 고의적으로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공고를 제대로 알리지 않고 총독부는 막대한 토지를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조선땅의 40%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임야조사사업, 어업령, 회사령 등으로 우리 민족을 계속적으로 수탈하였으며, 심해지는 수탈과 핍박으로 힘들어진 조선인들은 저항을 위해 독립의군부, 대한광복회 등의 단체로 1910년도에 활약을 하기 시작했고 1919년도에는 3.1 운동이 일어났다. 우리의 저항 의지를 보여준 3.1 운동은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고 이 소식이 해외에도 전해지자 일본에 대한 규탄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 1919년~1931년 문화 통치기
문화 통치기 시기에 일본은 해외의 따가운 시선으로 조선인의 문화창달과 민력 증진이라는 목적을 내세웠지만 일본은 뒤에서 조선인을 교묘하게 괴롭힐 계획을 하고 있었다.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군이 치안 유지를 담당하지 않고, 문관 경찰에게 위임하는 것으로 무력 지배에 대한 조선인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방안이었음)로 실시했지만 경찰 인력을 4배로 늘렸으며,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허용했지만 사전검열을 실시했고,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독립운동을 탄압했다. 또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여 조선의 농촌이 발전되지만 일본은 늘어난 수확량을 모두 일본으로 보내버린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1920년에는 물산장려운동(일제강점기에 국산품을 사용하여 우리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이루기 위한 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민족의 교육과 장래를 위해 민족 자신의 힘으로 대학을 세우고 운영 의지를 천명한 운동)이 있었으며 다양한 쟁의행위들이 일어나 소년, 청년, 여성운동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또한 신간회(1927년 좌우익 세력이 합작해 결성한 대표적인 항일 단체)가 조직되었으며 6.10 만세운동(1926년 6월 10일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장례식에 일어났던 독립 만세 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학생들이 일제의 지배에 대한 반감이 분출됨)이 일어났다. 3.1 운동 이후 191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여러 독립군들을 위해 지원하였다. 또한 의열단이 탄생하며 조선총독부, 종로경찰서 등에 공격을 퍼부었으며 북로군정서(3·1 운동 이후에 만주 왕칭현에서 조직된 무장독립운동 단체) 등의 무장독립단체는 봉오동전투(한국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에게 승리한 전투)와 청산리대첩(1920년에 김좌진,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 2,500명의 독립군들이 만주 청산리에서 5만 명의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 등으로 일본의 기를 눌러놓는다. 일본은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간도참변(1920년 간도에서 일본군에 의하여 한국인들이 무차별 학살당한 사건) 등을 저질렀으며 독립군들은 잠시 일본을 피해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했지만 러시아에 참변을 당하게 된다. 독립군은 만주로 내려와 3부를 결성한 후 다시 2개로 통합하여 혁신의회와 국민부로 독립활동을 이어나가게 된다.
- 1931년~1945년 민족말살 통치기
1931년에는 만주사변(1931년 일본의 만주에 대한 침략전쟁)이 일어나며 일본은 전쟁을 준비하게 되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일본은 내선일체를 강요하며 황국신민화(행사나 학교 조회에서 일본에게 충성하는 내용의 서약을 암송할 것을 강요함) 정책을 펼치며, 신사참배, 조선어 금지, 황국신민서사 암기, 창씨개명(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한 일) 등 우리 민족에게 조선을 강제로 지우려고 한다. 하지만 혁신의회와 국민부는 한중연합작전을 펼치고 조선광복회가 보천보 전투(1937년 6월 4일 김일성이 이끈 부대가 함경남도 보천보를 습격하여 일제를 몰아냄)를 치르게 되고 조선의용대의 탄생으로 활약하게 된다. 또한 한인애국단(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31년 일본 요인 암살을 위해 결성한 비밀의 독립운동 조직)의 윤봉길, 이봉창의 활약으로 인해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됐지만 일본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고 위안부, 마루타 실험 등의 만행으로 조선인은 계속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1940년에는 조소앙의 삼균주의(조소앙이 독립운동의 기본 방략과 조국건설의 지침으로 삼기 위해 체계화시킨 민족주의적 정치사상)로 한국광복군이 탄생하게 된다. 한국광복군은 2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여하여 미국, 영국 등과 연합작전을 펼치고 선전해 나갔으며 국내진공작전(일제 강점기에 항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외국에서 군대를 양성, 국내로 진공 하는 형식의 작전)의 계획으로 일본군을 몰아내 조선을 되찾으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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